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장엽 망명 사건 (문단 편집) == 남한에 온 이유는? == 그의 망명에 대해선 권력 암투설을 비롯해 숙청설, 대일 쌀협상 실패설, 심지어 그가 운영했던 주체사상연구소에서 금전사고가 났다는 설까지 수없이 제기됐지만 [[김일성]]의 [[김일성/사망|사망]] 이후 [[김정일]] 체제가 성립되면서 서서히 권력에서 소외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김정일에 비해 김일성에 대한 비판이 약하다는 의견이 존재하지만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라는 책에서 김일성을 [[https://www.newdaily.co.kr/news/article_s.html?no=58691&rvw_no=1552|"자기 아들의 권력 앞에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마지막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정권을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김정일과 함께 수치스러운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의 한 생의 전반부까지도 다 망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며 비판했다.]] 다만 김일성의 생 전반부나 후반부의 사건들에 대해 김정일에 비해 우호적인 표현으로 정당화한 건 사실이다. 김일성의 수없이 많은 과오들 중에서도 김정일에게 아부하고 정권을 넘겨준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통하여 생의 전반부까지 망쳐 버렸다고 평했다는 것은 황장엽이 주장해 왔듯 북한 사회가 가진 문제의 본질적 책임이 김정일에게 있다는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그런 김정일에게 권력을 물려준 것에 대해 김일성을 비판한 것이지, 문제의 본질적 원인 제공자로서의 김일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참고로 북한 특유의 막나가는 사회상은 [[도서정리사업]]으로 국민들의 [[사생활]] 개념을 완전히 삭제해 버리고 [[려행증]]이라는 악법을 통과시켰을 때 이미 사실상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도서정리사업은 이미 [[1967년]]에 있었던 일이다.] 실제로 황장엽이 남긴 글들을 보면 김정일에 비해서 김일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김일성을 비판할 때는 주로 김정일에게 권력을 물려준 점에 대해서만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주체사상을 창시하면서 [[김일성]] 앞잡이로 수십여 년을 호강하며 살았다. 그러다 [[김정일]] 밑에서는 권력이 줄어들고 봉급을 받지 못하게 되자 [[대한민국|남한]]을 임시 거처 삼아서 망명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이 [[반공]] 투사라고 하면서 애국자 행세를 했다. 게다가 그는 단지 반 김정일주의자일 뿐 그 자신이 창시해 [[수령]] 절대주의의 이념적 바탕이 된 [[주체사상]]을 철회하지 않았으며 오용당했다고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직접 주체사상을 가르치려고 했고 이 때문에 그와 같이 탈북한 김덕홍도 이를 비판하고 그와의 인연을 끊었다. 그래도 북한 권력 정상급에 있었기에 북한의 핵개발 등 나름 고위층에 대한 정보력이 높아 쓸만하다는 평도 있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북한에서도 불과 13년 때문에 4배가 넘는 기간 동안 자기들에게 봉사한 사람을 그렇게 대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많은 공산국가에서 아무리 공신이라고 해도 이용가치가 없어지거나 충돌이 벌어지면 가차없이 제거, 숙청하는 사례는 흔하다. 그 본보기로 북한과 마찬가지로 2대째 권력을 누리는 [[시리아]]의 아사드 일가를 봐도 다를 게 없다. 실제로 [[독재자]] 바샤르 알 아사드는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 휘하에 있던 노대신(?)들을 대거 숙청해 이들은 [[이란]]이나 여러 곳을 거쳐 [[미국]] 및 서구로 망명해서 신나게 시리아, 현 아사드 정권을 까고 있다. 물론 정권 싸움[* 숙부인 레하트 아사드를 숙청했다.] 탓도 컸지만 세습 [[독재자]]라고 아버지 때의 가신들에게 잘 봐 줄 것이라고 믿었으나 돌아온 결과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장엽의 망명은 대한민국의 국가 안보, 대북 정책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으나 북한의 최고위 정치인의 망명이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는 2월 12일 망명 후 주중한국영사관에서 쓴 자술서에서 망명 동기를 "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좀 더 넓은 범위에서 협의하고 싶은 심정"에서 망명을 결심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남북간 화해와 통일에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황장엽은 2월 12일에 쓴 자술서 외에도 이미 1996년 11월과 1997년 1월 2일에 썼다는 또 다른 서신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21300239104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7-02-13&officeId=00023&pageNo=4&printNo=23625&publishType=00010|2월 13일]]부터 다음날까지 [[조선일보]]에 공개되었다. 특히 2월 13일자 신문에 공개된 서신은 베이징 영사관에서 쓴 자술서완 전혀 딴판이었다. 여기선 한국의 노동자 파업[* 같은 시기 벌어졌던 노동법/안기부법 개악반대 총파업을 지칭한다.]을 비난하고 안기부와 군대의 강화, 강력한 여당 등을 주장했다. 마치 [[안기부]]나 정부 여당을 편들기 위해 조작된 게 아닐까 생각될 만큼 한국 사회에 대해 엉뚱한 훈수를 두었다. 이로서 황장엽의 망명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남북관계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에서도 보수 세력과 레임덕에 빠진 김영삼 대통령에게 [[북풍|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신동아]] 1998년 5월호에서 박성원 기자가 쓴 [[http://web.archive.org/web/20081122055631/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05/nd98050020.html#DOCBOTTOM|기사]]에 따르면 그의 망명은 1996년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여기엔 안기부는 물론이요 중국에서 활동 중이었던 이연길(1927~2009)[* 함경남도 원산시 출신 실향민으로, 1950년 6.25 전쟁 때 KLO 지대장으로 참전한 바 있다.] 휘하의 사설공작단체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및 [[김현철(1959)|김현철]] 라인 인사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원래 황장엽은 1997년 4월 인도 방문 계획이 잡혀 있었고 그때 망명하기로 했으나 정보가 새고 있다는 불안감에 중국에서 조기 망명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